현실과 이상사이

생각하면 눈물만

물결이 2021. 2. 14. 23:06


예기치 않게 닥치는 일은 마음에 사무쳐 한이 된다.

준비를 할 시간이 주어져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을 그냥 느닷없이 겪으라고하면 

아무리 무심한 하늘이라도 원망의 화살이 돌아간다.

소리치고 원망하고 절규해도 듣는건지 마는건지 항상 그 자리..

 

날이 너무 좋았다.

정말 오랜만에 가는 고향이었고 겨울같지 않게 따뜻한 연휴가 될 거라고 했다.

다행히 오전에 취소된 표가 있어서 기차를 탔고 집에 가서 점심을 먹었고.. 아빠는 일하러 가셔야 된다고 해서 카페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 막연하게 내일은 할머니댁에 가야지라고 생각했다.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았으니까.

 

아빠가 일을 마쳤다는 연락이 와서 길가에 나가 기다리고 있는데 차에 타자마자 말씀하셨다.

 

"장례식장 가야돼."

 

"누구?"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대"

 

귀를 의심했다.

믿어지지 않는 단어가 귀를 때렸다.

 

"갑자기 왜?"라는 말밖에..

 

어안이 벙벙했다.

할머니는 항상 그 자리에 있어야하는데.. 내일 보러 갈건데.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도착한 장례식장에 있어서는 안 될 얼굴이 사진으로만 남아 나를 보고 있었다.

고운 한복을 차려입고 덤덤한 표정으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절을 하면서도 내가 왜 여기있어야하는지 눈물만 줄줄 흐르고..

외삼촌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거의 십년만에 보는 걸까.. 영수오빠가 전화번호가 바뀌었냐며 말을 건다.

할머니가 천식으로 병원에 입원하셨었는데 아침까지만 해도 퇴원하겠다고 말도 하셨단다. 

면회를 하려면 코로나검사를 마쳐야 한다고 해서 접수해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느닷없이 당장 오라는 호출에 겨우 임종을 지켰다고.. 내가 부끄러웠다.. 난 왜 당연히 항상 집에 계실거라고 생각했을까.

 

얼마전 출근길에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으셨었다.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는데.. 마지막 신호였을까

 

외할머니가 그렇게 보고싶어하시던 오빠도 영수오빠 연락을 받고 왔는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밥이나 잘 차려먹는지 밤이나낮이나 걱정하시던 맨날 그렇게 보고싶어하더니..

내가 용돈을 드리면 꼭 그 반은 오빠한테 가져다주라며 다시 꺼내시고 내가 뭐가 이뻐서 주냐고 절대 안받는다면 아빠한테 갖다주라고 주던.. 그렇게 속끓이던 외손주가 그래도 삼일을 꼬박 빈소를 지킨다.

 

코로나 시절의 장례는 참 쓸쓸했다.

특히나 새해 명절이었다.

 
그저 그렇게 하염없이 울다 멍때리다

둘째날 입관식에서야 외할머니의 얼굴을 보고 실감이 났다

장의사는 우리 앞에서 얼굴에 곱게 분을 발라주며 구십이 넘은 연세에 이렇게 얼굴이 고우신 분이 별로 없다며 고우시다고 말씀해주셨다. 그분의 역경의 세월을 알고도 그 쪼글쪼글해진 얼굴이 곱게 보이실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저 보이는 모습은 말 그대로 고우셨다. 우리 할머니 얼굴 그대로..

 

우리는 수의를 입은 외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에 묵념을 하고 다같이 한바퀴 돌며 작별인사를 했다.

아무리 가슴을 치고 소리를 질러도 돌아오지 않는다는거 알지만.. 끅끅 눈물을 삼키고 또 삼키고.. 고생많이 하셨다고 그곳에서 보고싶던 얼굴들 만났기를 모든걸 내려놓고 행복하시길 빌었다.

 
입관을 마치고 그제서야 주변이 보였다.

십년이 넘는 기간동안 다들 많이 변해 있었다.

외당숙은 퇴직하시고 강의를 하신다고 명함을 주셨고..

미륵산 이모도 외숙모도 애기때보고 처음보는 외삼촌을 꼭 닮은 민수도 머리가 희끗희끗한 현수오빠도 낯설었다.

 

내가 가슴에 묻어두고 지냈던 사람들..

기억하면 엄마가 떠오르니까.. 

시간이 흐르는 대로 묻어두었던..

그냥 얼굴만 봐도 또 눈물이 왈칵난다..

아직도 나는 극복을 못한거 같다. 그저 묻어두었을뿐.

 

다들 자리를 지켜주셔서 고마웠다.

내가 아직도 인격적으로 성숙치 못해 고마움도 갚지 못하고 이렇게 세월만 보냈는데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라고 또 연락처를 주셨다.

 

할머니를 선산에 모시던 날은 하늘이 참 높고 구름 한 점 없이 파랬다.

겨울인데도 완연한 봄이 온 것처럼 날씨가 따뜻했다.

충주에서 오셨다는 스님, 일꾼들, 마을 이장님이 준비해놓으신 자리에 유골함을 넣고 우리는 재배를 드렸다.

 

나비처럼 훨훨 자유로워지시길

모든 걱정 근심 다 내려놓고 행복한 곳으로 가시기를 간절히 빌었다.

 

우리는 할머니의 인생의 한을 감히 짐작해볼 수도 없을거다.

 

生은 苦라

인생이 괴로움이라..

얼마나 많은 세월을 그리움에 침잠해 사셨을지.. 이제 그 곳에서 모두 다 만나셨기를. 그 곳에선 활짝 웃으시기를

그리운 얼굴들 만지고 부비며 행복해하시기를..

 

나는 그저 울고 또 울고 울지않으려고 이를 앙물고도 뚝뚝 턱끝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제발.

 

 

항상 그 자리에 당연히 있는 사람은 없다.

알면서 또 당연히 생각하고 있었던 내가 밉다.